Search

시와 밥 - 전라매일

pasar2kali.blogspot.com
ⓒ e-전라매일
어린 시절 시골 집 마당 한 귀퉁이에 꽃밭 하나를 만들려다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거기에서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하시는 말씀이었다. 일제치하에서 대동아 전쟁을 치르고 6.25를 거치면서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던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꽃밭에 정신을 팔고 있는 장손자의 앞날이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내가 아닌 게 아니라 평생 돈도 되지 않는 시(詩)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를 두고 어떤 이는 ‘시가 밥이 되느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시가 밥보다 나을 때도 있다. 성찬(盛饌)을 차려 놓고 아무리 들라 해도 밥 한 톨 입에 대기 싫을 때 – 산다는 게 그저 우울하고, 쓸쓸하게 여겨져 꼼짝하기조차 싫을 때, 이럴 때 어디엔가 숨어 있던 삶의 진정(眞正)이 명경지수처럼 고여 들면서 때론 누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듯 시가 조용히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곤 한다.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또 그리워지는 것이다.’- 푸쉬킨의 시 ‘삶’처럼, 그래-, 산다는 것은 이처럼 항시 무엇인가 아쉽고, 고달프고 힘든 일이지만, 이 또한 언젠가는 그리운 날의 추억이 되리라. 고요함이 쓸쓸함처럼 밀려오는 날이면, 이럴 때 나는 시를 마신다.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그동안 괴롭고, 가슴 저렸던 사연들이 어느새 가시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곤 한다.
요즈음 시를 읽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시인도 많고 시인 지망생들도 많은 것 같은데, 시를 읽는 독자들을 만나기는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에 시가 무슨 밥이 되겠느냐고? 밥이 분명 인간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이없다. 그렇다고 밥만 가지고 살 수 없는 게 또한 인간이다. 눈에 보이는 빵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정신마저 황폐화된다면 인간은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밥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한동안 많은 것을 잃고 살아왔다. 일제침략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의 정신문화는 식민사관과 반공 그리고 경제논리로 길들여져 인간의 존엄은 뒤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정신이 부패하면 물질도 부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밥을 위해 우리는 과시적 물량 성과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결과, 진지함이 경박함에 밀리고, 정신적 덕목들이 경쟁과 속도에 밀리면서 시 또한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시인이 죽은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시는 국민 언어의 정화(精華)이기에 시가 성(盛)하면 나라도 역성(亦盛)하며, 시가 쇠(衰)하면, 나라도 역쇠(亦衰)한다.’는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말씀처럼, 시는 국민정서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에 한 나라의 문화 속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크다. 일제가 우리의 시를 애써 퇴폐적 정서와 병약한 감상으로 왜곡시켰던 식민사관도 기실은 그들이 이러한 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물질에만 열중하여 우리의 정신문화가 방치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는 그 특유의 심미적 감성과 상상력으로 세상에 대한 폭 넓은 사랑과 이해 그리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새롭게 발견하여 주기 때문에 시를 짓고 감상하는 것은 창조적 사유의 한 생산 방식이다. 이질적 세계에서 동질성을 찾아내는가 하면, 불투명한 추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내기도 한다. 이러한 탐구적 상상력이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발견하고, 위기를 창의적으로 풀어 가는 인간의 고등정신 능력이다. 이러한 창조적 고등정신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능력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 예술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경쟁원리도 좋고 돈벌이도 좋지만, 이제 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시가 밥이 되고, 밥이 시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땅에서 시가 튼튼하게 살아나지 않는 한, 그 어떤 경제 논리로도 우린 결코 튼튼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할 수가 없기에 하는 말이다.

/김동수 시인
본지 독자권익위원회 회장

Let's block ads! (Why?)




July 19, 2020 at 04:14PM
https://ift.tt/2ZFCluM

시와 밥 - 전라매일

https://ift.tt/37nJamS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시와 밥 - 전라매일"

Post a Comment

Powered by Blogger.